결핵 진단의 새로운 동반자, AI가 의사를 대신하다
[서울=뉴스닻] 최승림 기자 =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감염병인 결핵(TB)과의 싸움에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중저소득국에서는 방사선 전문의 없이도 AI 판독 알고리즘과 이동형 X선 장비를 결합해 수 초 만에 결핵 여부를 진단하는 시스템이 확산 중이다.
지난달 말 의사 한 명 없는 말리의 보니아바 지역 보건소에서 기침이 심한 한 어머니가 AI가 분석한 X선 이미지를 통해 결핵 양성 판정을 받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환자가 검사를 받으려면 도시로 이동해 가래 검체를 채취하고 1~2주 뒤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결핵은 매년 120만 명 이상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세계 최악의 감염병이다. 특히 의료 인력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방사선 전문의 수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어 진단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어떤 나라엔 방사선 전문의가 다섯 명도 없습니다. 대부분 수도에만 있고, 지방은 사실상 공백이에요.” 국제결핵퇴치기구 ‘스톱TB 파트너십’의 루치카 디티우 사무총장은 AI 도입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현재 80개 이상 국가가 AI 기반 결핵 스크리닝을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이지리아의 유목민 마을에서도 “먼지와 가축뿐인 벌판 한가운데서 AI가 결핵을 찾아내는 장면은 놀라울 정도”라고 말했다.
말리에서 활동하는 비의료인 디아키테 랑신은 이동형 X선 장비와 노트북, 배터리팩만으로 하루 수십 명을 검사한다. X선을 찍으면 AI가 폐 이미지를 ‘열 지도(heat map)’ 형태로 표시하며 위험 부위를 붉게 표시한다.
그는 “빨간색은 이상 소견입니다. 이런 부분이 보이면 바로 가래 검체를 받아 실험실에 보냅니다.”라고 설명했다.
AI 도입 이후 현장에서는 불필요한 가래 검사 수가 절반으로 줄었고, 어린이처럼 검체를 내기 어려운 대상도 더 쉽게 선별할 수 있게 됐다.
세계에이즈·결핵·말라리아퇴치기금(GFATM)의 피터 샌즈 사무총장은 “AI는 의료 인프라가 없는 곳에서도 결핵을 찾아내는 혁신적인 도구”라며 최근 4년간 2억 달러 이상을 AI 결핵 진단 사업에 투자했다고 밝혔다. 난민 캠프가 있는 차드에서도 AI 판독 시스템이 도입돼, 전문의 없이도 즉시 판독이 가능해졌다.

MIT의 컴퓨터과학자 레지나 바질레이 교수는 스리랑카의 한 병원이 “비싼 상용 AI를 살 수 없다”고 하자 직접 오픈모델을 개발했다. 그는 “결핵은 AI가 가장 다루기 쉬운 질병 중 하나”라고 말한다.
“엑스레이만 있으면 돼요. 환자가 결핵인지 아닌지 라벨이 붙은 이미지로 학습시키면 됩니다. 개발비는 5만 달러도 안 들었죠.”
그는 결핵용 AI가 폐암, 폐렴, 심혈관 질환 등 다른 흉부 질환 진단에도 확장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전문가들은 선진국보다 오히려 개발도상국이 AI 의료를 더 빠르게 받아들일 것으로 전망한다. 디티우 사무총장은 “전화선이 없어도 바로 휴대전화 시대로 건너뛴 아프리카처럼,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일수록 AI 통합이 더 빠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전문의들은 규제 공백을 우려한다. 필리핀의 방사선 전문의 어윈 존 카르피오는 “AI가 진단을 놓쳐도 책임 체계가 없고, 모델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도가 떨어져도 스스로 알리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AI가 ‘조용히 실패(silent failure)’할 수 있다며 정기적인 품질 관리와 외부 전문가 점검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 관계자들은 “의사조차 없는 곳에서 AI는 결코 완벽하지 않아도 생명을 구한다”고 말한다. AI 덕분에 결핵 조기 발견률은 WHO가 2021년 기술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이후 뚜렷이 향상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AI가 찾아낸 환자들이 실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의료 접근성을 확장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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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림 기자 (seunglim.choi@newsdot.net)